2006년 4월 어느 봄날 아침, 독일 Karben의 KTV EU Office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스위스 Roadstar 본사의 임원이었다. 인사를 짧게 주고받은 후 그가 꺼낸 이야기는 길지 않았다.
"이탈리아에 SKD 조립 공장을 함께 설립합시다."
이 한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11년 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1995년, 같은 테이블의 두 사람
1995년 EU 반덤핑 관세가 한국 TV 산업을 직격했을 때, KEC에 살아 있던 작은 한 점은 Roadstar Switzerland의 10인치 이하 모바일 TV 유통망이었다. 14인치 이상은 사실상 차단됐지만, 작은 사이즈는 살아 있었고, Roadstar는 그 작은 시장의 유럽 전역 채널을 갖고 있었다.
그때 우리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하나는 단기 이익 극대화 — 줄어든 공급량을 무기로 가격을 올리고, Roadstar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요구하는 길이었다. 위기는 종종 그렇게 활용된다.
다른 하나는 함께 통과하는 길이었다. 한국-필리핀-EU 삼각무역 구조를 설계해 14인치 이상 TV의 우회 경로를 만들고, Roadstar에게는 안정적인 공급과 가격 경쟁력을 보장하는 쪽. 우리의 마진은 줄지만, 거래선의 부담도 함께 줄이는 구조였다.
우리는 후자를 택했다. KEC 입사 3년차의 영업 담당이었던 내가, 위기에 거래선을 쥐어짜는 일은 영업이 아니라고 판단한 결과였다.
1995-2005: 흐름이 만들어 낸 신뢰
그 후 10년 동안 Roadstar와의 거래는 한 번도 끊기지 않았다.
1997-98년 IMF 외환위기로 원/달러가 1,900원까지 치솟았을 때, 한국 측 가격 경쟁력은 폭발적으로 살아났고, Roadstar는 그 흐름의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였다. 위기에 우리가 부담을 나눠 가졌던 결정이, 호황 국면에서 가장 빠르게 이익으로 되돌아온 셈이다.
2002년 KTV Global Corporation으로의 분사도 그 관계를 끊지 않았다. 한국 측 법인이 바뀌어도 거래 약속은 그대로 이어졌고, Roadstar는 한 번도 우리에게 "다른 한국 공급선을 검토 중"이라는 카드를 꺼낸 적이 없다. 그것이 그쪽의 답례 방식이었다.
2005년 나는 KTV EU Office를 독일 Karben/Niederwöllstadt에 설립했고, Elimex GmbH와 협력 생산 거점도 함께 만들었다. Roadstar는 첫 해부터 안정적인 매출원이 되어 주었고, 1년차에 월 200만 유로 매출에 도달하는 데 핵심 축이었다.
2006년 4월, 입장의 역전
그리고 그 봄의 전화였다.
"이탈리아에 SKD 공장을 함께 설립합시다."
11년 전 우리는 Roadstar에게 부탁하는 입장이었다. 막힌 시장에서 우리 제품이 들어갈 작은 통로를 그쪽 유통망에 의지했다. 그때 Roadstar 입장에서 KEC는 "한국 공급사들 중 하나"였다.
2006년에 그쪽이 우리에게 제안한 것은 단순한 추가 발주가 아니었다. 함께 자본을 들여, 함께 위험을 지고, 이탈리아에 로컬 생산 거점을 만들자 는 제안이었다. SKD 조립이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지면 "Made in Italy" 원산지가 붙는다. 반덤핑 같은 외부 충격에 영구히 면역이 되고, 무엇보다 그것은 단순 매입자-공급자 관계가 아니라 공동 사업 의 제안이었다.
거래선과의 관계 그래프가 11년 만에 반대 방향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제안이 가져온 변화
이 제안을 받고 나는 곧 KTV에서의 다음 단계를 결정한다. 2006년 후반 영국에 Jung Consulting Ltd.를 설립하고 독일에 Niederlassung을 두어, Roadstar를 비롯한 EU 거래선들과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깊은 자문 베이스로 발전시켰다. 이후 10년간 Roadstar는 Jung Consulting Ltd.의 핵심 클라이언트 중 하나로 남았다.
Italy SKD 구상 그 자체보다 더 큰 결과물은, 그 제안 한 통이 내 커리어 후반의 진로를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단순 영업자에서 자문가로의 전환은, 11년 전 위기에 함께 선 한 거래선의 신뢰가 만들어 준 다리였다.
30년 후 한국 SME 사장님들께
오늘의 시점에서 이 이야기에 두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위기에 거래선을 쥐어짜지 마라. 단기적으로 거래선의 부담이 줄면 우리의 마진은 줄어든다. 그것이 영업의 "낭비"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거래선은 모든 것을 기억한다. 호황기에는 잊혔던 그 기억이, 다음 위기 — 혹은 다음 큰 기회 — 가 올 때 가장 먼저 활성화된다. 위기에서의 transactional 자제는 비용이 아니라 다음 사업을 위한 투자다.
둘째, 큰 거래는 큰 거래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작은 거래에서 신뢰가 검증된 후에야 큰 거래가 따라온다. 1995년 우리는 10인치 모바일 TV라는 작은 카테고리로 Roadstar와 거래를 이어 갔다. 그 작은 거래가 11년 후 함께 공장을 짓자는 제안으로 되돌아왔다. 한국 SME가 EU 거래선과의 관계를 자주 단절하는 이유는 "작은 거래는 시간 낭비"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가장 큰 기회를 미리 닫는다.
지금 ICT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거래선들과의 관계 역시 같은 원칙으로 운영한다. 이번 분기의 마진보다 다음 10년의 관계가 더 크기 때문이다.
길은 항상 있다. 그리고 길은 종종, 11년 전 같이 걸어 준 사람을 통해 다시 열린다.